제목 [매거진S] 작은 영웅들의 꿈의 그라운드
작성자 운영자 날짜 10-04-30 오전 9:45:43 조회수 2731
[매거진S] 작은 영웅들의 "꿈의 그라운드"



1970년대 중반 기자는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인 소위 ‘잘 나가던 학생’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걸어서 등굣길에 홍수환이 남아공의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WBA 밴텀급 타이틀을 거머쥔 그 경기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 까만 겉가죽이 반질거릴 정도로 손에 담고 다니던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주된 용도는 야구, 바로 고교야구였습니다. 때로는 수업 시간에, 혹은 도서실에서 몰래 듣던 그 야구의 짜릿함이란! 곁에서 보채는 친구들에게 계속 실황 중계를 하면서 몰래 들었던 그 당시 고교 야구는 정말 최고의 인기였습니다.



특히 역전의 명수라는 군산상고가 짜릿한 역전승을 벌이던 바로 그 순간에는 손에 들고 있던 보물 같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떨어뜨려 박살 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역시 잊혀 지지 않는 순간인데(정말 가슴이 철렁했다는) 기록을 찾아보니 1972년 부산산고와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결승전이었던 같습니다. 1-1의 팽팽하던 경기는 9회 초 부산고의 3득점으로 거의 결정이 난 것으로 보였지만 군산상고는 9회 말 극적인 역전극을 끌어내며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김일환, 김우근, 김일권, 양기탁, 김준환 등의 귀에 익은 이름들이 당시 명승부의 양 팀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소형 라디오를 들고 몰래 야구 경기를 들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아스라하지만 정말 당시 고교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1967년 대통령배 제 1회대회 개막 시구를 하는 박정희 전대통령 (사진 제공 : 중앙일보)

대한민국 고교 야구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05년 한성고교(현 경기고)가 고교 야구의 시효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어 1907년에 경신, 휘문고가 그리고 1911년에 보성, 오성, 중앙, 배제고 등에 야구부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전을 펼쳤습니다. 당시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녔던 동경유학생 팀과의 경기가 실력 발전에 큰 자극이 됐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무명옷 유니폼에 짚신을 신고 시작한 고교 야구는 1920년 창설된 조선체육회의 첫 행사가 될 정도로 당시에도 인기를 끌었고, 1923년에는 휘문고가 조선 예선 우승팀으로 일본의 제9회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1979년 제13회대회 -TV로 생방송되던 대통령배 대진표추첨 전국시도대표 20개 팀의 주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황인용 아나운서의 진행에 의해 TBC- TV로 생중계되던 제13회 대통령배고교야구대회 대진표 추첨의 모습에서 당시 고교야구 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사진 : 중앙일보 제공)

그러나 고교 야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인기를 구가하게 된 것은 1945년 독립 이후였습니다. 1946년 9월에 개최된 제1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근대 고교 야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대회가 바로 청룡기의 전신입니다. 지금부터 64년 전에 고교 전국대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곧이어 1947년에는 현 황금사자기의 전신인 제1회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쟁패전이 시작됐습니다.

6.25 전쟁으로 공백이 있었지만 1953년부터 대회가 부활했고, 1957년에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 경기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에는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창설됐고, 1971년에는 전국의 모든 고교 팀이 출전하는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한국 고교야구의 수준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970년부터 일본고시엔대회 우승팀과 한일 고교대항전이 벌어졌는데 통산 27전 14승9패4무로 우위를 지켰습니다. 1981년 미국 뉴저지 주에서 벌어진 제1회 세계 청소년야구대회 결승에서 미국을 3-1, 3-2로 연파하고 남자 구기 종목 국제경기에서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상 위키피디어 참고)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추신수는 1999년~2000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부산고를 우승으로 이끄며 2회연속 MVP를 차지했습니다(사진 : 중앙일보 제공)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고교 야구의 인기는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전까지 고교 야구는 실업이나 대학 야구를 훨씬 능가하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고교 야구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현재 한국 프로야구와 그리고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그들의 고교 야구에 대한 추억과 회상,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조언 등을 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이 보낸 고교 야구 시절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이종범(40ㆍKIA 타이거스) -꿈과 목표를 세우고 끝없이 노력하라

1988년이면 벌써 22년 전, 그러나 이종범은 광주일고 3학년 시절 청룡기대회 군상상고와의 결승전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라이벌 군산상고와의 결승전은 9회까지 4-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11회 말 투아웃에 주자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종범은 좌익선상으로 흐르는 끝내기 2루타를 치면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주역이 됐습니다.

이종범은 "정말 우승을 해야만 했다. 당시 광주상고가 우리에게 눌려 지역 예선 거의 항상 2위였는데 대통령배에서 나가 우승을 해버렸다. 그 이유만으로 한 시간 반을 얼차려를 받았다. 광주상이 전국대회 우승을 했으니 우리도 반드시 우승을 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종범은 고교 시절을 회고하며 “당시는 프로야구보다 국가대표가 꿈이던 시절이었다. 대학, 국가대표를 거쳐야 1차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체구도 크지 않고 해서 이기기 위해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요즘 고교 야구를 하는 새까만 후배들에게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꿈을 향해 정말 열심히 뛰어야 한다. 나는 오직 야구만의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었다. 정신적으로도 강해져야 한다. 요즘 선수들을 보면 조금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개개인의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프로든 어디든 적응하기 어렵다. 꿈과 목표를 세우고 정말 열심히 하길 바란다."라고 조언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2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기아 타이거스의 정신적 지주이자 효과적인 야수이자 타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숭용(39ㆍ넥센 히어로스) -달랐지만 바람직했던 최약팀

"1,2학년 때는 야구에 대한 기억조차 거의 없고, 통틀어서도 야구 때문에 재미있던 기억에 별로 없다." (웃음)

농담 비슷하게 한 이야기지만 이숭용의 고교 시절은 좀 남다릅니다. 그가 다니던 당시 중앙고 야구부는 참 약했습니다. 3년간 예선 본선 합쳐서 4승을 거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1989년에는 봉황대기 본선에 나갔습니다. (이 대회는 지역 예선 없이 모든 팀이 나갑니다.) 1회전에 동산고를 만났는데 생전 경험도 없던 나이트 게임. "위재영이 투수로 나왔는데 야구하면서 가장 빠른 공을 그 때 봤다. 와, 진짜 빠르다, 이런 공도 있구나 하는 생각!” 그래도 악착같이 해서 아슬아슬하게 패했습니다. 그리고 휘문고와 동산고의 결승전을 보러간 기억도 있습니다. 하필이면 유일하게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우승팀을 1회전에 만난 것이었습니다.

야구는 정말 열심히 했지만 당시 중앙고는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6교시까지는 무조건 수업에 들어갔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며 이제 고인이 되신 사경만 감독은 야구부원들에게 신문 사설을 써오게 하시고 한자쓰기도 배우게 하셨다. 그래서 공부가 끝나면 야간 훈련까지 하고 귀가하고는 했다."

이숭용은 동기 중에 유일하게 대학에 갔습니다. "왼손에다가 덩치가 커서 뽑힌 것 같다. 대학 가서도 정말 열심히 했고 경희대 4학년 때 우승이라고는 처음 해봤다."

이숭용은 "다른 팀이 잘 하고 우승하고 하면 너무 부러웠다. 그러다 돌이켜보면 위안도 된다. 기본기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만 야구도 공부도 열심히 했던 기분 좋은 추억들이 많은 고교 시절이었다"

비록 꼴찌 팀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지만 이숭용의 고교 야구팀은 남부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서울대 야구팀을 찾았다가 느꼈던 기분이랄까요. 학생 야구의 나가야할 방향을 진즉에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박찬호(37ㆍ뉴욕 양키스) -정말 많이 배우고 노력하고

박찬호의 공주고 시절 우승 기억은 한 번 뿐입니다. 3학년 때는 준우승만 해봤고 2학년 때 전국체전 우승이 유일합니다. 1990년 청주에서 열린 대회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아주 어수선했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모두 합숙소에서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그 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모두 정학을 당할 정도로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이를 악물고 뛰었던 것 같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박찬호의 기억은 정확치가 않았습니다. 강팀들과 계속 만났고 두 경기는 구원, 두 경기는 선발로 나갔던 것 같다고 했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박찬호는 4경기 모두 구원으로 나가 4번의 구원승을 거뒀습니다. 부산고와의 1회전에서 5이닝 1실점의 구원승을 시작으로 영흥고, 대전고, 그리고 충암고와의 결승까지 모두 구원승을 거두는 특이한 기록이었습니다. 박찬호는 "그 해 봉황대기 우승팀인 대전고, 청룡기 우승팀인 충암고 등과 만나는 아주 힘든 대진이었는데 정말 이를 악물고 해서 우승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박찬호의 고교 시절은 야구에 대해 정말 많이 배우고 또 노력했던 시절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양창희 감독은 투수들에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킬 정도로 선진 기술을 전수, 헬스클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박찬호는 전했습니다.

연습벌레였던 박찬호는 "매일 밤마다 옥상에서 1000번의 스윙을 하고야 잠자리에 들었다. 합숙 훈련 때도 애들이 잠들면 몰래 나가 혼자 운동을 하기도 했다. 정말 잘하고 싶어서 많이 노력하고 승부욕을 불태우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습니다.
박찬호는 후배들에게 "체계적인 운동을 하고, 배우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터득하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인터넷 등에서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고, 또 때론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구는 이제 글로벌 스포츠니까 미래를 위해 인성을 키우는데도 노력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김광삼(30ㆍLG 트윈스) -9회말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로

고교 시절 5번이나 우승을 맛 본 사나이. 안치홍, 봉중근, 한상훈 등의 황금 멤버들과 함께 9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김광삼은 2학년 때인 1997년 광주일고와 벌인 황금사자기 결승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동대문야구장이 완전히 만원 사례였다. 광주일고에는 정성훈, 최희섭, 이현곤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있었다. 그 해에 우리와는 1승1패였다. 1회 초에 현곤이형인가가 3점 홈런을 때려 0-3으로 밀렸는데 곧바로 내가 3점 홈런을 때려 3-3이 됐다.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며 9회 초까지 7-7이었다. 9회 말 (현)재윤이형이 2루타를 때리고 (봉)중근이가 볼넷을 골랐다. 다음 타자 (안)치용이형이 파울 홈런을 치자 볼넷으로 걸렀다. 당시 파울이 되자 치용이형이 운동장에 드러눕던 장면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리고 내 타순이 됐는데 광주일고 투수가 좌완 김광우였던가, 어쨌든 좌측 펜스를 때리는 결승타를 때렸다"

그 당시가 여전히 생생하기만 한 김광삼은 "내가 눈물이 없는 편인데 그 때는 모두 끌어안고 울었다. 그 전까지 다른 결승전에서는 너무 쉽게 이긴 경기들이 많았는데 그 경기는 정말 접전이었고 중근이가 미국 가기 전에 마지막 경기에서 꼭 함께 이기고 싶었고 그래서 더 감격적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고의 고교 시절을 보낸 김광삼은 1학년 때 선배 혇들에게 너무 혼나고 많이 맞아서 선배가 되서는 때리지 않는 풍토를 세웠던 것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마 1학년 때 100대는 맞았을 꺼다. (웃음) 그래서 재윤이 형이 주장이 되면서 때리지 말자고 했고, 내가 주장이 됐을 때도 그렇게 했다. 1년 동안 한번 쯤 맞았을까"

후배들을 돌아보면서 김광삼은 현명한 선택을 당부했습니다. “당시에 미국 진출이 활발했고 기회도 있었다. 나 역시 도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선택을 정말 잘 해야 한다. 무모하지 않으면서 올바른 선택이라면 찬성이지만 예전에 비해 너무 헐값에 가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든다.”라면서 부모님과 상의해 미래를 잘 결정하라고 말했습니다.

★송승준(30ㆍ롯데 자이언츠) -우승보다 패한 경기의 기억이

어떤 이에게는 우승의 짜릿한 기억이 제일 강하게 남아있지만 또 어떤 선수에게는 결승에서 아쉽게 무너진 아픈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고교 시절 4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경남고 에이스 송승준에게도 가장 잊지 못할 경기는 바로 1998년 대통령기 결승입니다.

동향의 라이벌인 경남상고와의 맞대결, 당시 그 팀에는 김사율, 이택근이 투, 포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정규 이닝까지 4-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전날 준결승에서 완투한 송승준은 9회부터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연장 12회 초에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터뜨려 7-4로 앞섰다. 우승이다 싶었다. 그런데 12회 말에 7-5까지 쫓겼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옆 동네서 야구를 해서 잘 알던 친구 김호영이 타석에 나왔다. 정말로 연습 경기 포함해 내 공을 제대로 친 적이 없는 친구였다. 투아웃에 풀카운트, 스트라이크 하나면 우승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방망이를 옆으로 눕히는데 느낌이 쌔~했다. 그리고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2점 홈런을 맞았다. 그쪽이 우리 경남고 응원석이었는데, 그 때 호영이의 친동생이 우리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그 홈런공을 그 동생이 잡았다고 했다"

송승준은 그 후 봉황대기 결승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삼진 17개를 잡으며 고교 시절 최고의 피칭으로 우승의 주역이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의 고교 시절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예로운 시절이라고 했습니다. "워낙 어린 나이였고, 이기려고, 우승을 하려고 정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야구 명문 경남고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대단한 명예였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좋은 지도자 밑에서 운동을 하면서 야구가 무엇인지를 배운 시절이었다."

시즌 초반 고전하고 있는 송승준은 더욱 그 시절을 되새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복잡한 생각 없이 오직 승리를 위해 노력하던 고교 시절의 그 마음을, 초심을 다시 새기고 찾으려고 노력한다. 심리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그 때의 초심을 생각하며 반드시 롯데의 우승을 위해 일어서겠다"라는 것이 송승준의 다짐입니다.

★김선우(33ㆍ두산 베어스) -완투, 쐐기포에 몇 십 년만의 우승

"내가 야구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들이 많았고, 꿈을 갖게 된 시절이었고, 추억이 가장 많은 시절이었다"

김선우가 2학년이던 1994년 휘문고 야구부는 창단 이래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특히 청룡기에서는 중학교 팀과 고교 팀이 동반 우승을 하면서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김선우는 "낮에 벌어진 중학교 결승에서 후배들이 우승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 동대문야구장에서 유동훈 투수의 장충고와 맞붙었다. 우리가 88년만의 우승을 노리고 장충고도 40여년만의 우승 도전인가 그랬다. 3-2로 앞서던 경기 후반에 내가 투런 홈런을 치면서 완투승을 거뒀다.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승리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김선우는 1회전에 절친 서재응의 광주일고를 만나 직접 서재응에게 결승타를 치면서 승리했고 준결승에서 마지막 3이닝을 제외하고는 전 경기를 책임지면서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고3때 좋은 전력을 가지고도 우승하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도 남는다는 김선우는 "3학년 때는 거의 혼자 던졌던 것 같다. 그런데 광주일고에는 재응이 말고 또 병현이가 있었다. 대회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라며 아직도 그 때의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김선우는 요즘도 기회가 되면 고교 야구 경기를 봅니다. "어린 선수들의 기량이 많이 올라 왔더라. 야구도 예쁘게 하고 세대가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고교 야구는 지금도 재미있게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졸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김선우의 가슴에는 아직도 고교 시절의 뜨거웠던 열정이 남아있습니다.

★박석민(25ㆍ삼성 라이온스) -지역 예선에서의 끝내기 홈런이

대구고 3학년 때 두 번의 우승(대통령기, 대붕기)을 차지한 박석민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역시 전국 대회 우승? 그러나 그는 의외로 2학년 때 청룡기 대구 예선 경북고와의 경기가 그에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전이라고 했습니다.

"9회 초까지 2-0으로 지다가 2-1을 만들고 만루에서 기회가 왔다. 그리고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쳤다. 그때 정말 경북고와 치열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정말 잊을 수 없는 경기다" 그런데 그 만루포로 1승1패를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재경기에서 패해 청룡기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2003년 대통령기 결승 경주고와의 경기는 너무 일방적으로 진행돼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고, 대붕기 세광고와의 결승전에서는 1회 선제 투런 홈런을 치고 5-4로 승리했는데 고향에서 우승을 차지해 기억이 남다릅니다.

박석민이 돌아본 고교 시절은? "합숙훈련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쉬는 날 빼고는 거의 합숙이었고 동기들이 정말 운동을 열심히 했다. 새벽에 한 두 명이 나가기 시작하면 거의 모두 나가서 훈련을 했고, 야간에도 몰래 나가 훈련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면 박석민은? "나는 그렇게 따로 훈련에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웃음) 할 때는 아주 열심히 하고 쉴 때는 푹 쉬자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그러나 기본기에 충실하게 훈련한 고교 시절은 지금의 박석민이 되는데 가장 큰 몫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교 시절의 추억은 그에게 더욱 소중합니다. 손가락 부상으로 재활원에서 운동하고 있는 박석민은 5월 중순경에는 다시 돌아와 고교 시절부터 가다듬은 스윙을 팬들에게 다시 보여드리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유원상(24ㆍ한화 이글스) -마지막 투아웃을 잡지 못한 아쉬움

유원상은 천안북일고 시절 준우승의 기억이 훨씬 많습니다. 탄탄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4강권에, 준우승만 4,5번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유승안 경찰청 감독의 연수 시절 미국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천안북일고에 입학한 유원상은 1,2학년 때는 외야수에 3학년 때 주로 투수를 하면서 지명 타자로 뛰었습니다.

고3 때인 2005년 무등기 결승전이 그에게 가장 짜릿하면서도 아쉬운 기억입니다. 1회전에서 손영민의 청주기공고에 완봉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출발, 광주진흥고와 만난 결승에서도 선발 출전하며 팽팽한 투수전 끝에 9회 원아웃까지 1-0으로 앞섰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들떴는지 갑자기 흔들리며 볼넷 2개를 내주고 장필준과 교체됐습니다. 결국 우승해 대단히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또 너무 아쉬웠던 경기였습니다.

지난 23일 LG에 완봉승을 거둔 날도 9회에 쓰리볼까지 몰렸다가 결국은 극복하고 첫 완봉승을 거두자 경기 후 동생 유민상은 "형, 무등기 결승 보는 줄 알았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저 재미있고 즐거워서 야구를 했던 유원상은 천안북일고에서 3년 내내 합숙을 하며 훈련도 많이 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는데, 정말 프로 선수의 꿈을 키운 것도 바로 고교 시절이었습니다. "새벽에 몰래 나가 놀기도 하고, 친구들과 정말 친해지고 즐거운 일도 아주 많았다. 그러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정말 열심히 훈련하면서 체력적으로도 아주 좋아져 진정한 야구 선수의 길을 보게 됐다.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그 때 꾸게 됐다"

서울 대회 우승을 못한 것이 한이라는 유원상은 고교 후배들에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즐겁게 야구를 하라" 조언합니다.

★김광현(22 SK 와이번스) -청소년 대회의 잊지 못할 추억

"고교 대회보다는 청소년 대회의 기억이 가장 뚜렷이 그리고 영원히 남을 겁니다"

김광현은 안산공고 3학년 때 4강에만 3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승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관리 차원에서 4강까지만 마운드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 미추홀기에서 우승한 것이 유일한 기억입니다. 네 경기에 모두 나가 3분의2이닝을 빼고 전부 던져 유일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김광현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고교 시절 대회는 바로 2004년 세계청소년 대회입니다. 결론부터 밝히면 김광현은 4승을 거두고 금메달과 함께 최우수 선수상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그 대회가 쿠바에서 열렸다. 금메달과 MVP 트로피는 정말 초라했다. 유치원 때 웅변대회에 나가 받았던 메달 같이 조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과 더불어 내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 대회 대한민국 대표 팀은 화려했습니다. 양현종, 이용찬, 임태훈 등 김광현과 함께 현재 프로야구를 호령하는 젊은 세대들이 투수진의 주력이었습니다. 김광현은 "현종이가 선발로 가고 내가 뒤를 맡은 식이 많았는데 현종이가 잘 던지면 내가 승을 챙기는 식이었다"라며 (웃음) "미국과의 결승전은 심판들의 편파 판정 속에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친구들이 마지막에 맞고라도 나가겠다며 진루했고, 번트 후에 불규칙 바운드 안타로 4-3으로 이겼다. (추)신수 형 때 화려한 멤버로 우승한 후에 처음이었는데 정말 감격적인 승리였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그 때의 감동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고교 시절에 대해 김광현은 "돌이켜보면 정말 야구를 재미있고 즐겁게 한 것 같다. 지금은 야구가 전부고 한 게 이거밖에 없어 나의 직업이지만 안 그런 척해도 부담도 크고 힘들다"고 털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그때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즐겁게 했고 그래서 지나고 나면 또 실력도 많이 늘어 있었다. 안 아프고 꾸준히 열심히 하면 프로에 와서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루하고 힘들 때도 분명히 있지만 다치지 말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영일(22ㆍLA 에인절스 마이너) -16회 완투패의 아린 기억

"고3때 고향 광주에서 열린 무등기에서 우승한 것도 잊을 수 없지만 역시 고2때인 2006년 청룡기 결승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야구팬에 회자되고 있는 광주진흥고와 경남고의 결승전. 이 경기는 사상 최고인 16이닝의 혈투로 치러졌고 정영일은 16이닝을 모두 던지며 결국 완투패를 했습니다. 정영일은 “결승에 가기 전까지 4경기를 모두 완투했다. 결승전이 되자 몸이 무겁고 팔이 뭉쳤지만 일단 마운드에 오르니까 모두 잊었다. 2회 초에 내가 홈런을 쳐서 1-0이 됐는데 4회 말에 폭투로 동점을 줬다. 그리고 계속 점수가 나지 않다가 16회 말에 그만.."

16회 말 경남고 선두 타자가 실책으로 나간데 이어 번트에서 1루를 커버하던 2루수와 주자가 부딪히며 다시 실책. 만루 작전을 폈지만 9번 신본기의 끝내기 안타가 나와 정영일의 진흥고는 1-2로 패했습니다. 정영일은 "너무 지쳐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항상 파이팅 넘치고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던 그런 순간들을 잊을 수는 없다. 고등학교 가서 제구력도 좋아지고 스피드도 많이 빨라지면서 정말 야구를 많이 배웠다. 지금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 정도로 좋았던 시절이었다"라고 그리워했습니다.

정영일은 준우승한 청룡기에서 우수투수상과 최다안타상을 받았고, 무등기 우승할 때는 최우수선수상과 타점상을 받았습니다. 현재 정영일은 그 추억을 발판으로 애리조나 주 에인절스 익스텐디드 캠프에서 팔꿈치 수술을 딛고 열심히 던지고 있습니다.

★안태경(20ㆍ텍사스 레인저스) -폭투로 날릴 뻔한 우승

부산고 2학년 때 안태경은 아주 좋았습니다. 150Km 넘는 강속구를 던지며 초고교급 투수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우승도 고2때 이뤘습니다.

2007년 화랑대기 결승은 부산고와 경남고의 맞대결이었습니다. 부산고는 정수민이 선발로 나섰고 안태경이 뒤를 받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회에 정수민이 주자 2명을 내보내자 곧바로 안태경이 투입됐습니다. "그런데 안타를 맞고 2점을 내줬다. 그러나 그 후로 계속 잘 막았고 팀이 3-2로 역전한 채 9회를 맞았다. 우승은 눈앞에 둔 9회 말 투아웃 주자 2,3루에서 투스트라이크를 잡고 나서 폭투를 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연장전으로 넘어간 끝에 10회에 부산고가 4-3의 짜릿한 재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안태경은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지만 고등학교 때 투수 교육을 다 받았다. 조성옥 감독님과 김민호 감독님 밑에서 야구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어떻게 운동을 하는지,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웠다. 지금은 미국에 와서 또 새로 시작했지만 그 때 배웠던 것들, 그 때의 마음가짐과 투지 등이 그대로 가슴에 남아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고 열심히 할 자신감을 심어준 고교 시절이 있어서 정말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서울에 14개 팀, 부산에 5개 팀 등 총 53개의 고등학교에서 야구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회도 많이 늘어서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등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와 무등기, 대붕기, 화랑대기, 미추홀기 등의 지방대회가 열립니다. 그리고 전국체전에서도 고등부 야구 토너먼트가 벌어집니다.



70년대에 비해서 고교 야구의 인기는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었어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학생 선수들의 야구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몸을 아끼지 않는 감투 정신, 그리고 학교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투지 넘치는 명승부들입니다.

한국 야구가 제 1,2회 WBC에서 연속으로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누며 4강, 그리고 준우승을 차지하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한 고교 야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가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포츠로 자리한 것도 고교 야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덕수고는 200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사진 제공 : 중앙일보)

마침 목동야구장에서는 대통령배 야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야구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과 투지에 한번 빠져보는 것도 이 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프로야구와는 또 다른 매력이 고교 야구에 분명히 있습니다.